요즘은 차박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이용해 아웃도어 활동을 즐기는 것이 비단 요즘만의 일은 아닙니다.
요즘의 차박 열풍처럼 1990년대에도 캠핑이 무척 인기 있었죠. 1980년대 후반 마이카 붐을 거쳐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자가용 시대와 함께 본격적인 레저 열풍이 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텐트를 차에 싣고 산과 들로 향했으며,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든든한 사륜구동 프레임보디 SUV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했죠.
국내 사륜구동 RV 시장의 선두주자는 쌍용차였습니다. 1988년 5도어 스테이션 왜건 형태의 코란도 훼미리를 먼저 내놓았던 것이죠.
한국에서 스테이션 왜건을 거의 처음 소개한 이 차는 사실상 오늘날 국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는 SUV 시장의 개척자라 할 수 있습니다.
레저 열풍을 타고 국내 SUV 시장을 주도했죠. 당시 4인 가족의 여가 생활에 딱 맞는 차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현대는 1991년에 갤로퍼를 내놓아 응수했습니다. 그런데 갤로퍼는 엄밀히 따지면 현대자동차가 만든 차가 아닙니다.
현대그룹의 또 다른 계열사인 현대정공의 자동차사업부에서 만든 첫 차였죠.
당시 현대차는 정주영 회장의 동생인 정세영 사장이, 현대정공은 장남인 정몽구 사장이 지휘하고 있는 별개의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훗날(1999년) 두 회사가 통합되어 지금의 현대차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쌍용차의 경우 지프형 차를 꾸준히 생산해왔던 터라 자체 개발이 가능했지만 후발주자였던 현대정공은 기술력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현대정공은 1989년 사륜구동 RV를 개발하는 M-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당시 현대차의 제휴선이었던 미쓰비시와 손을 잡고 1세대 파제로를 들여오기로 했습니다.
이미 미쓰비시는 신형 파제로(1991년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구형 파제로의 기술 이전에는 협조적이었죠.
현대정공의 자동차 제작은 처음이었지만 라이센스 생산이었던 덕에 개발과 출시 과정은 비교적 순조로웠습니다.
1990년에 울산 공장에 생산설비를 갖추고 1991년 9월에 ‘갤로퍼’란 이름으로 발표했죠. 갤로퍼의 이름에는 ‘전속력으로 달리는 경주마’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요.
출시 당시에는 5인승 기본형 모델과 6인승 고급형 모델이 있었고 가격은 각각 1,175만원, 1,295만원이었습니다.
미쓰비시 파제로의 디자인을 크게 손보지 않은 탓에 갤로퍼의 디자인에서는 1980년대의 향기가 물씬 풍깁니다.
베이스가 된 1세대 파제로는 1982년에 등장했으며, 갤로퍼의 실질적인 원형이 된 1세대 후기형은 1987년에 등장했죠.
갤로퍼가 한국에 출시된 1991년 일본에서는 2세대 파제로가 판매를 시작했으니 갤로퍼는 태어날 때부터 좀 올드한(좋게 말해 클래식한)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선보인 쌍용 코란도 훼미리와 달리 1세대 파제로는 일본뿐 아니라 수출 시장에서도 이미 검증된 차였기에 완성도는 나쁘지 않았죠.
구동계는 최고출력 73마력의 직렬 4기통 2.5L 디젤 엔진에 5단 수동변속기가 기본이었고, 이후 2.5L 디젤 터보 엔진과 V6 3.0L 가솔린 모델이 추가되었습니다.
갤로퍼는 출시와 함께 상당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코란도 훼미리보다 뛰어난 완성도를 바탕으로 순식간에 RV 시장의 스타로 떠올랐죠.
온 가족이 산과 들로 짐을 잔뜩 싣고 캠핑을 떠나기에 이 만한 차도 없었습니다.
현대정공 역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갤로퍼 대장정 이벤트 등을 열면서 갤로퍼의 강인한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한국 RV 시장의 대표주자가 되었습니다.
현대정공은 갤로퍼의 출시 이후 상품성을 꾸준히 개선해 나갔습니다.
1992년에는 국산 SUV 최초로 4단 자동변속기를 옵션으로 마련하는 한편 경쟁 모델인 코란도 훼미리에는 없는 숏보디 모델을 추가하기도 했죠.
1994년에는 헤드램프를 사각형으로 바꾸고 ABS와 LSD를 추가한 페이스리프트 모델인 뉴 갤로퍼를 출시했습니다.
코란도 훼미리로 스테이션 왜건형 SUV 시장을 열었던 쌍용차는
막강한 현대정공의 갤로퍼에 사실상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1993년 무쏘, 1996년 뉴 코란도를 선보이며 반격에 나섰습니다.
특히 무쏘와 뉴 코란도는 당시 쌍용차의 제휴선인 벤츠의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앞세워 갤로퍼 롱보디와 숏보디가 차지한 SUV 시장을 탈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갤로퍼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1997년에 디자인을 좀 더 새련되게 다듬은 갤로퍼 2로 거듭난 것이죠.
직선형의 다부진 모습에서 벗어나 곡선을 곳곳에 더해 조금 더 부드러워진 인상이 특징이었습니다.
엠블럼 역시 새로 바꿨는데요. 현대차와 같은 알파벳 ‘H’를 사용했지만 조금 더 날렵한 모양으로 다듬어 현대차와 차별화했습니다.
특히 1998년에는 경쟁차에는 없는 V6 3.0 LPG 모델과 숏보디 모델의 개선형인 갤로퍼 2 이노베이션을 출시하는 등 갤로퍼의 상품성을 꾸준히 업그레이드했습니다.
당시 최고급차에만 얹던 6기통 엔진을 얹은 V6 3.0 LPG 모델은 지금도 중고차 시장에서 쏠쏠한 인기를 자랑합니다.
디젤 엔진과 달리 매끄러운 V6 엔진의 회전 질감을 누릴 수 있고 연료비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니까요.
옛 감성의 SUV를 찾는다면 아주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갤로퍼 2는 한계도 분명한 차였습니다.
실내의 경우 일부 개선을 거쳤지만 1980년대 설계한 원형 모델의 디자인이 남아 있어 여전히 올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편의장비 면에서도 확실히 구형 모델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웠습니다.
갤로퍼 2가 출시된 1997년, 국내 자동차 시장은 IMF의 호된 서리를 맞았습니다.
이에 현대정공은 현대모비스로 이름을 바꾸고 자동차 부품에만 집중하는 체제로 돌입하고, 자동차 부문을 현대자동차로 넘깁니다.
따라서 1999년부터 갤로퍼의 제작은 현대자동차에서 온전히 맡게 되었고, 2000년부터는 현대자동차의 엠블럼을 달게 되었죠.
이후 현대차는 2001년에 현대 테라칸을 갤로퍼의 상위 모델로 내놓았고, 쌍용차는 렉스턴으로 화답하며 고급 SUV 시장의 양자 대결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2002년에는 기아차에서도 쏘렌토를 내놓자 갤로퍼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1980년대의 감각으로 만든 차였기에 2000년대에 등장한 차들과 경쟁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죠.
2003년, 드디어 갤로퍼는 단종에 이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갤로퍼는 클래식한 디자인 덕분에 복고풍 자동차를 찾는 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게다가 현대차가 신형 싼타페에 갤로퍼의 디자인 요소를 불어넣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돌고 있습니다.
포니의 디자인이 떠오르는 아이오닉 5처럼 과거 모델의 디자인 요소를 신형 모델에 담겠다는 것이죠.
과연 갤로퍼의 추억을 신형 싼타페에서 느낄 수 있을까요? 한번 기대를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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